살면서 스치는 생각들을 작은 공간에 모아 내면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본다.

 

2025

 

 나의 프레임

 원하는 그림을 원하는 크기의 프레임에 넣고 그려본다.

 처음엔 하얀 백지처럼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비어있다.

 하나씩 작은 프레임 안에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아져,

 신윤복의 풍속화처럼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녹아들기 시작한다.

 그냥 눈을 감고 나의 프레임 안을 들여다보며 집중하면,

 서서히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시나리오를 원하는지는 외부의도에게 맡겨보는 것도 좋다.

 그냥 환희로 가슴벅찬 것들을 가지면 된다.

 나는 무엇을 생각할 때 가슴 벅찬가?

 해야만 하는 것들에서 나를 놓아주고 싶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혼자 은밀하게 원하는 것을 말한다.

 나 아닌 당신을 의식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난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프레임을 갖고,

 그 안에서 맘껏 뛰놀고 싶다.

 어느 한 곳 눌림이 없는 그 곳에서…

 타인의 숨소리에서도 그 내면을 감지하는 예민함에서도 벗어나고…

 함께여도 혼자일 수 있는 뻔뻔한 용기…

 그리고 이제서야 나의 프레임 안에서 환희를 느낀다.

 

 영화 필름 고르기

 자유로운 음악 여행하는 필름

 아름다운 새 집들을 3채 갖는 필름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한 가족 필름

 이 모두가 들어있는 필름..

 

 진상과 허상

 생각과 느낌이 계속 교류하다가 결론을 유도하게 된다.

 어떤 느낌이 맞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가 틀린 것들도 많다.

 느낌이 왔을 때, 생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글을 쓰듯 보정해가는 과정을 거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그 느낌이 옳았다는 것은 행동의 결과나 상대의 반응으로 인지할 수 있겠다.

 만일 그 느낌이 틀렸다면, 그런데도 그것으로 계속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생각을 좁혀나간다면

 허상을 좇아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늘 내 느낌이 맞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허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몰고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면 느낌을 생각으로 정리하고, 다음 단계인 방법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나는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결과에 대한 안과 밖에 대한 생각들도 해보고,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한 작은 공을 던져보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순간의 선택들에 대한 결과에서 오는 것들에 수습하며 보내는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온갖 가상함

 지성, 고상함, 우아함, 인내, 친절,

 자기 계발, 변화를 위한 노력, 희생,

 인정받기, 최선, 비우기,

 이런 가상함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모두를 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런 가상함에 눌려 늘 허기지고,

 채워지지 않는 완벽함에 열등감을 지니고,

 가상함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누르고,

 행복을 가장해야 하는 무게까지..

 이 많은 과목을 모두 A를 맞으려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게에 늘 눌려 있는 것이다.

 나는 또 누군가를 많이 누르고 살고 있다.

 타인을 누르지 않으려 애쓰는 것 또한 나를 누른다.

 늘 눌리고 있다는 피해의식 속에 나의 강함을 잊어버린다.

 눌림없는 자유로움은 그 어디에도 없는가?

 산 속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그럴 수 있을까?

 자연에 눌려야 하겠지.

 살아 있음은 눌림을 의식하는 것일까?

 아니 의식하지 않는 것일까?

 그냥 눌리는대로 또 누르기도 하며 그렁저렁 살다 가면 되겠지.

 이 눌림은 때로 느낌으로 오기에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가상함을 가장하며 죽을때까지 살 것이다.

 

 의도의 수력학

 과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압력에 의해 솟아오른다.

 의도의 수력학은 이렇게 작동한다.

 가지려는 결정과 행동하려는 결정이 순수하다면,

 나는 욕망하는 것을 무조건 손에 넣을 수 있다.

 물 위를 걷고 싶은가? 그쯤은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가지려는 의도에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목표 슬라이드를 돌려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슬라이드는 수압 펌프처럼 의도릂 믿음으로 퍼 올리기 위한 작업이다.

 단지 한두 방울씩 퍼 올리게 될지라도,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용의주도하게 하다 보면, 이 행동이 점차 쌓여 막강한 힘이 된다.

 동시에 나의 의심없는 의도의 안락지대가 넓어지며, 주변 현실에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의 의도로 계속 비추는 형이상학적 공간의 섹터가 물리적인 층으로 솟아 오를 것이다.

 이것이 의도의 수력학이다.

(바딤 젤란드)

 

 나는 물 위를 걷고 있다

 꿈 속에서 나는 용이 되어 날아다녔다.

 여기 저기 날아다니며 속속이 보고싶었지만 다시 몸으로 돌아왔다.

 나는 나의 꿈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내가 원하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바닥이 장식된 patio에서 친구들과 음식을 나누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춘다.

 몸이 날아갈 듯한 행복감이 나를 감싸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내면의 평화를 위해 셈 없이 내어준다.

 내가 꿈 속에 있을 때 나는 그림자의 역할을 한다.

 내 형상과 그림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간다.

 Fiction과 nonfiction,

 정방향과 역방향,

 흉내와 실제,

 그러기 위해선 그림자를 진지하게 연기해야 한다. 그리고 꾸준히 해야 한다.

 그림자의 알고리즘은,

 내가 갖고 싶고 되고 싶은 형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현존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원하는 것을 이미 가진 것처럼 흉내 내고 행동하는 것이다.

 방법은 필요없다.

 자유롭다.

 

 사랑주의

 천성과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형이 어느정도 분류는 되겠다.

 천성보다 환경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가장 밀접한 환경인 부모, 형제의 영향.

 안 볼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관계성에서 원하지 않아도 받아야 하고,

 받고 싶어도 포기해야 하고, 온갖 사회가 만들어낸 제약 안에서 의무는 커지고..

 홀로 박차고 나의 인생을 살겠노라 날아갈 수 있는 용기도 특별한 상황이 만들어낸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언저리에 머물며 힘들어하는 것은 용기 부족이리라.

 그 안에 있으면 떠나려고 발버둥치고,

 어쩌다 밖으로 밀려나 힘들면 그들의 핑계를 대며 환경탓을 한다.

 지금 이러고 있는 나의 모습도 그것들의 산물이다.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관계성과 제도의 규제와 책임을 빼면 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자유로움의 방대함 앞에서 제발 나를 속박해달라고 애걸하며 다닐지도 모른다.

 도를 닦으러 산으로 피신해놓고, 늘 사람들을 초대하는 승과도 같을지도..

 자유로움은 속박 안에서 갈구하고 평안은 복잡한 관계성에서 구한다.

 내가 묶어놓은 밧줄 안에서 일생 살아야 한다면 좀 더 객관화 시켜 즐기는 방법이 있다.

Outsider 로 살면서 보이는 모순적 인간들에 눈감고 살기가 불편하고,

 진화하지 않는 인간의 종에 불편해하고, 그들이 Outsider 가 아닌 것에 불편해하지만,

 나의 권한 밖의 일이기에, 이 세상에 온 같은 손님 입장이기에,

 무심의 맘으로 사랑해야 한다.

 지금의 나의 내면이 변하고 싶다면 안하던 짓을 해야 한다.

 나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은, 나에게 눈길을 모아 나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길이다.

 그러면 다른 이들에게 관대함이 생기리라.

 이기주의도 개인주의도 아닌 사랑주의다.

 

 나의 찬란함?

 나에게 찬란함이란 무엇일까?

 물질적인 것일까?

 되고싶은 것일까?

 내면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일까?

 보여지는 것일까?

 갖고싶은 것을 다 가지면 더 이상 욕망이 없어질까?

 그 끝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겠지.

 건강하게 되고싶고,

 예쁘게 되고싶고,

 지적이고 싶고,

 그 모든 것에 만족할 만큼 다 갖추었다면 나는 찬란할까?

 커다란 구멍의 허탈감만이 스멀거릴 것이다.

 진정한 나의 찬란함은 만족감, 감사, 행복감, 기대감, 자유로움, 경이로움의 순간들이다.

 이런 순간들을 숨이 멎을만큼 벅차게 느끼는 것.

 내 세포들 사이에서 이런 빛들이 새어나오는 것.

 그 찬란함이 우주를 비출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끼는지 세어볼 것이다.

 내가 우주에 빛을 뿌리는 순간들이 얼마나 되는지..

 

 다른 문화 속으로

 서성거리는 흑인형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였고, 그들은 들러리였다.

 흑백사진 속에 나만이 칼라가 입혀진..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주에서 온 나는 지구의 말을 모른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것이다.

 말하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내 안에 들어있는 뱉어지지 않은 그 많은 생각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 안에서 익히고, 삭히고, 되새김질하다 그저 숨 한 번 뱉는 걸로 다 할 수 있거늘..

 그러다 한 마디 한다는게 서툴기 그지없어 자신이 깜짝 놀라기도 한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진정한 문화라는 건 모든 걸 동원해서 하는 소통이다.

 문화란 ‘나’ 이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

 나이가 들어가며 다른 문화들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너무나 많은 네트워크 속에서 그들의 내면을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속은 다른 데 가 있는 흑인형들이 주위에 서성거리고 있다.

 하나의 문화로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사실 누가 문화인지, 흑인형인지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다.

 상대에게 나는 문화인지, 흑인형인지도 눈치채야 하고..

 선을 그을 수 없는 관계성에 화살표까지 넣어가며 계속 긋고 있다.

 살아있음이라고 위안하며 이 힘든 여정을 즐겨야 하겠지.

 인생 안에 퐁당 빠져서…

 

 갑자기 서러움

 매트 위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다가 갑자기 서러워 통곡하고 싶었다.

 뭔가 생각을 했었겠지만 입이 먼저 삐죽거리며 나를 앞선다.

 늘 했던 생각들이고,

 늘 생활 속에 녹아들던 인내들이고,

 내가 싫어하는 자기 연민이 밀고 들어오고,

 의지로 꾹 누르던 온갖 부정적 생각들이 몰려오고,

 나의 생은 정말 이대로 허접하게 끝나는 것인가 하고,

 생동감 넘치고 건강함이 발 끝을 올리고,

 행복감에 전율하고, 감사가 넘치던 그 모든 것은 의지였던가?

 그 의지들을 놓으면 남는건 서러움이던가?

 이 편도 저쪽도 아닌 그 중간에 서 있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아주 조금씩만 느끼며 휘청거리며 가겠지.

 그래서 전화기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는지도..

 생각없이 살려고..

 좋은 쪽으로 가면 불안하고, 그 반대는 서럽고..

 깊은 내면에는 서러움이 있는지..

 우울이 깊다는 말은 있어도 행복이 깊다는 말은 없는듯..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빠져들지 말라고 그 많은 것들을 하라고 하나보다.

 본성에 충실하지 못하게 갈고 닦으라고..

 서러움은 행복감이나 기쁨처럼 순간적이지 못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집요하게 끌고 내려간다.

 그래서 평소에 잊는 연습을 해야 하나보다.

 꼬꼬물을 하고 싶어도 다 잊고 할 것이 없게..

 어차피 기쁨은 순간적이니 잊어도 또 느끼고 하면 되니까..

 서러움엔 망각이 최고의 약인듯 하다.

 

 나는 느끼기 위해 여기에 있다

 느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 숨쉬는 동안 무언가를 느끼고,

 그 느낌을 알아채고,

 그로 인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할 수도 있고,

 또는 그 느낌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생을 살며 불행할 수도 있겠다.

 어떤 느낌을 선택하며 이 길을 가야 하는지 명백해졌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느낌이다.

 그 느낌은 나 외의 모든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겠지만,

 나에게 온 느낌들을 걸러내고 정화시키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마구 들어오는 그 느낌들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 상처 투성이가 되어 기진맥진 해질 것이다.

 나를 지키는 필터를 만들어 가는 것이 Self-help 인 것이다.

 살아가며 밀려오는 고통과 좌절, 실패 속에서 정화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보다 실패가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유용함을 이끌어내는 것이 산 자의 할 일이 아닐까…

 

 머릿속이 짜릿할 정도로

 이 말이 너무 좋다.

 타프티의 이런 표현이…

 “나는 머릿속이 짜릿할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다.”

 요즘 내 머릿속을 짜릿하게 하는 구절이다.

 정말 매순간을 이렇게 짜릿하게 느끼며 살고 싶다.

 살아 있음은 근육의 움직임이다.

 나의 동영상을 보면 내 의식에 상관없이 움직이는 행동들을 보게 된다.

 손의 움직임, 얼굴 근육의 움직임..

 비춰지는 나를 보며 나도 모르는 나의 내면을 느낀다.

 나의 내면을 들켜버린 느낌이랄까..

 과장과 냉정함이 흐르는…

 나는 늘 내가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보며 느끼는건 누름과 고뇌를 삼키고 있는 듯 했다.

 나의 내면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짜릿하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외친다.

 좋은 느낌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말 한다는 것

 작곡가는 음표로 말을 하고,

 화가는 붓으로 말을 하고,

 작가는 글로 말을 하고,

 감정은 근육으로 말을 하고,

 병은 통증으로 말을 하고,

 말은 입에서 정화되지 않고 나올 수 있고,

 말은 순간적인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고..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택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임윤찬을 선택했다.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연주회 여행을 선택했다.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글 쓰기를 선택했다.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젤란드 책을 선택했다..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산책을 선택했다.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매일 스트레칭 하기를 선택했다.

 나는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

 

 구토

 서러움이 내면으로부터 오는 자기연민이라면,

 구토는 외부로부터 오는 자기연민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살아야 하는 연민,

 자기 합리화로 치장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들..

 인정하지 않는 아집에 쌓인 사람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머리채를 잡고 누르는 사람들..

 텅 비어 있는 마음을 허영으로 채우는 사람들..

 자기 편을 만들려 애쓰는 사람들..

 마음이 아닌 말로 위로하는 사람들..

 든 척 하는 사람들..

 된 척 하는 사람들..

 난 척 하는 사람들..

 척은 진실이 아니다. 그 안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일 뿐..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 끝없는 도전과 반응을 하는 아기를 보며,

 본능적인 이 과정에서 무엇이 끼어들어 이 순수한 성장을 방해한 것일까?

 생존의 본능이 앞서기 때문일까?

 이 모든 사람들의 속성들이 나에게 들어 있음에 나는 서러움에 오열한다.

 

 나는 왜

 나는 왜 행복하냐 하면,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이 제거되었을 때를 생각하니,

 그럼 그 때 나는 또다른 불행의 요소를 찾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지금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왜 자유로우냐 하면,

 나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갔을 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허망해져 또 나를 잡아줄 뭔가를 찾을 것 같아서이다.

 지금 그래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지금이 나에게는 최선이고 최상의 것이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전제는

 나를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할 뿐이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그리고 또 무언가 오리라.

 오고 가는 것들에 휘둘리며 시간을 보내기에 내가 너무 아깝다.

 나는 살아야 한다. 아주 행복하게…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가

 완벽한 요람?

 완전한 보살핌?

 댓가없는 사랑?

 계산없는 마음?

 왜 마음의 계산기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건지..

 이런 것들을 바라는 것은 이미 계산을 해봤다는 것이겠지.

 그 어떤 관계에서도 성립되지 않는 것들..

 나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지도, 보살피지도 못하면서..

 누구한테 그것들을 바라겠는가?

 나는 아주 잘 살아왔고,

 내 사고는 늘 명료했으며,

 모든 관계성에서 나는 탁월했고,

 나는 자신감에 넘쳐 있고,

 이런 나에 대한 신뢰도 어느 순간 빛을 잃어 어둠 속에 있게 된다.

 깊은 수렁 속에서 얼마나 하우적거려야 하는지.

 나의 독백을 남에게 나열하며 잘난척 하던 내 모습,

 왜 독백을 그들에게 나열하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 잘난척은 왜 하는가?

 그 독백들이 남들에게는 독이 되어 아프게 할 수도 있었고,

 단정적인 사고나 말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강한 벽을 느끼게 했을지,

 나를 단죄하고 인정한다.

 칭찬을 먹고 춤추며 발이 아픈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애처롭다.

 남에 의해 행, 불행을 느끼는 나처럼..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 왔는가?

 나는 내 안에 있기를 바란다.


 

2024

 

12/31/2024

2024년도 감사하며 지나간다.

 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며 현재를 흘려보내는 인생 속에서,

 나는 순간순간 어디에 서서 어디로 발을 디딜 것인지 선택한다.

 그 순간들의 선택을 본능적으로 잘 하기 위해,

 평소에 촉의 끝을 잘 갈고 닦아야 한다.

 짧지만 내 안으로의 집중하는 시간은 촉을 관리하는 시간들이다.

 그 안에는 무한대로 펼쳐진 많은 도구들이 있다..

 나한테 맞는 도구를 찾기 위해서는 자주 들어가 봐야 한다.

 과거들은 순간을 선택한 결과들이다.

 그 선택들은 나를 둘러싼 촉들의 도전과 반응의 반사각에 따라,

DNA 만큼이나 많은 발현들을 초래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2025년 또한 최선으로 선택하며 반사각을 지켜보련다.

 이렇게 현존의 시간에 서 있음에 감사하며…

 

 내면의 아기에게

 어릴 때나 커서나 내가 아파하고 힘들 때,

 나를 안아주고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아프다고,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얘기를 하지 않아서 없었던걸까?

 하지만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맘이 아니면 사랑이 없는 측은지심일 뿐.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기에 다른 이에게 할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나의 엄마가 되어 나를 달래준다.

‘힘들지? 이리와, 안아줄게.’

‘괜찮아. 뭐든 네가 원하는대로 해.’

‘난 늘 네 편이야.’

‘다 잘 되게 돼있어.’

‘네가 행복하면 된거야.’

‘의무감에 긴장하지말고, 늘 편하게 좋은쪽으로 생각하며 살아.’

‘네 생각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좋게 생각하는 힘이야.’

’언제든 힘들다고 생각들면 뛰어오너라~‘

’안아줄게~’

 힘들다고 뛰어오면 이렇게 해 주리라.

 나도 내 딸들에게 이렇게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나를 잘 위로하리라.

 그래서 그 누구도 해주지 않는 위로를 나에게 하고싶다.

 

 

 에너지의 조율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의식을 일깨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의식적으로 따져보자.

 그리고 나의 태도를 바꾸자.

 비관적으로 보이는 변화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기를 의도하면,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사소한 것으로 에너지를 낭비해서 내 인생에 상처를 내지 말자.

 적은 에너지의 많은 소모를 가볍게 넘기지 말고, 조율을 하자.

 시끄러운 마음을 명상으로 잠재우는 것도 에너지 조율이다.

 내가 지금 아픈 것은 적은 에너지가 많이 쓰였기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지금 돈이 없다면 적은 지출을 많이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지금 외롭다면 다른 곳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살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무 사심없이 내 것을 내어주는 일은 아주 드물다.

 설사 내가 그렇게 주어도 받는 이는 계산하고 자기도 모르게 이용한다.

 그래서 현명한 에너지 소모는 자기애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다.

 에너지 조율의 기준은 나로부터이다.

 

 나와의 데이트

 때로 내가 그 누구한테도 이해받지 못하고,

 내 얘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이도 없고,

 내 편이 되어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고,

 각자의 내적, 외적인 이득을 위해 ‘척’하며

 내 곁에 머무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느낌이 들때면,

 갑자기 밀리드는 외로움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진정한 나의 곁에 있어줄 누군가는 이 세상에 없는듯하다.

 그러다 내 영혼인 Dawnstar 가 느껴졌다.

 내 안에서, 곁에서 늘 지켜보고, 이해하고, 이끌어 주었던..

 그래서 나와의 데이트를 시간 날 때마다 하기로 했다.

 느낌의 대화, 직감의 대화로..

 나도 누군가를 위해 ‘척’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근육의 긴장을 풀고, 머릿속을 풀고 만나는..

 그 안에 풍요와 행복이 있으리라.

 

 우주의 흐름을 방해하지 말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움직여 흐르는 우주의 흐름.

 우주의 진행 공정을 방해하는 것은 걱정, 불안, 통제, 두려움이다.

 내적 자아가 우주의 흐름이다.

 우주의 세포분열에 저항을 주지 말자.

 내면의 영혼과 목표를 함께 하며, 우주의 흐름을 지켜보자.

 애쓰지 않고 평온하게 리듬을 타자.

 창조의 공정

 지도를 보고 그 위에 서 있으면서 실제의 지경에 서 있는 줄 착각하지 말자.

 

 내 선택은

 나는 내 세계관 안에서 옳고,

 당신은 당신 세계관 안에서 옳다.

 또 그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옳다.

 이 다양함을 인정해야 한다.

 운명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작은 종이배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고,

 내가 선택한다면 그 선택은 항상 실현된다.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그래서 선택과 함께 모든 일에 의식적으로 책임을 떠맡는다.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 때 다른 선택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지금 나의 선택들로 생의 이 선에 서 있다.

 다시 그 때로 간다면,

 나는 더 자신감있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길을 선택할 것 같다.

 더 어릴 때 자신감 있게 나의 옷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면,

 지금 더 자유로운 선에 서 있었을텐데..

 생이 아쉬워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도 (柔道)

 상대의 힘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

 운이 좋게 흐르게 하려면 대항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움직여야 한다.

 부드러움이란 통제와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의 길에 있을 때, 역경이 계속 될 때,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것이 선물이 될 때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그것이 부드러움이다.

 

 멈춘다는 것

 무의식 습관적 행동에서 잠시 멈추는 것.

 백 한가지 생각들에서 잠시 멈추는 것.

 새로운 물건을 가지게 됐을 때 잠시 시간의 공간을 두는 것.

 이들은 내 등 뒤에 붙어 있는 나의 영혼에게 묻는 시간들이다.

 우주의 에너지는 낭비가 없다.

 가장 빠른 길, 가장 짧은 거리, 가장 적절한 시간 안에 있다.

 멈춘다는 건, 그걸 느끼고 알아채는 순간이다.

 

외부 의도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고 애쓴다.

-세상이 내가 원하는 것을 준다.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세상이 나를 위해 팔을 벌리고 있다.

 

벽을 뚫고 지나가려고 애쓴다.

-벽이 눈앞에서 허물어진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애쓴다.

-그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뻔뻔하게 주문하라

최상의 것을 얻는 사치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라.

그런 호사를 자신에게 허락하라.

내 영혼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뻔뻔함을 자신에게 허락하라.

양껏 주문하라.

불가능한 것을 요청하라.

아찔한 정도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이뤘다고 늘 상상하라.

한계란 없다.

태연하게 슬라이드의 심상화를 체계적으로 계속하라.

모든 상상은 이미 현실이다.

 

 무대 아래로...

 이 인생의 무대는 꿈이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고 해서 진실은 아니다.

 이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객석에 앉아보자.

 그리고 많은 관계 속에서의 나의 역할을 보자.

 TV 드라마를 보면서, 안타까운 상황들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할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잘못된 관념들이나,

 허공에 대한 믿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다시 나의 무대로 올라와,

 객석에서 볼 수 있었던 헛점들을 이제부터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난 의식이고, 모든 이치들을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꿈을 깬다는 자체가 나에겐 엄청난 깨달음이다.

 

 임윤찬

 음악이 책이 되고, 인문학이 되어 다가올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임윤찬에게 감사한다.

 책대신 음악을 듣게 만든다.

 영혼을 건드리고, 우주를 느끼게 해주고, 깨달음을 주는..

 그의 손 놀림 안에 그 모두가 들어 있다.

 그 안에 작곡자에 대한 감사와 겸손이 들어 있고,

 꿈의 이 세계 안에서 진정한 진실을 찾으려는 의식이 있고,

 그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맑음으로..

 광대가 아닌 진정함의 전달자가 되고자 하는..

 악보의 완벽한 기술은 예의이고,

 그를 더 빛나게 만들기 위한 이해와 노력은 깨어있는 의식이다.

 이미 그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으리라.

 내 자신이 그의 팬듈럼이 되지 않기 위해..

 그냥 아름다운 영혼이 음악으로 그를 표현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지금의 행복감을 만끽하고 싶다.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

 난 이미 받은 것이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자신에게 설득한다면,

 이미 그것은 거기에 속해있지 않은 것이다.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자식이라면, 책임감 하나로라도 가능하겠으나,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관계성에서…

 그래도 난 후회 안할거라고,

 난 많이 행복했었다고…

 아무런 바램도 없다고…

 주기만 해도 된다고…

 이렇게 설득하면서까지 그 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

 나도 나의 한 사람에게 자신에게 그런 설득을 하게하지 않으려,

 줄 수 있는 걸 많이 주려 했고,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것은 관계성에 대한 자유로움이고,

 그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거울 앞에 선다

 늘 내 앞에 거울이 있다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그런 깨달은 의식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나에게 나는 것이 아닐까,

 상처를 받는 것은 어떤가?

 나의 모습이 초라해 보여서일까?

 사람이 무언가에 빠진다는 것은 뭔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닐까..

 사람에 빠지고, 예술에 빠지고, 책에, 종교에..

 나는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빠진다. 자연에…

 아니다, 도피하기 위함이다. 사람의 지루함에서..

 다시 거울 앞에서 묻는다.

 무엇을 비추고 싶은지…

 비추어진 나를 볼 용기가 있는지…

 내가 나무, 돌, 바다로 비추어졌으면 좋겠다.

 

 나는 나로

 그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는..

 Maslow 가 말하는 욕구의 단계는 나이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닐까..

 유아시절의 생리적 욕구,

 유년시절 부모의 보호 안에서의 안전에 대한 욕구,

 청년이 되어 종족 보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애정, 소속의 욕구로..

 장년이 되어서는 조금 정신적, 경제적 안정을 느끼며 존중의 욕구가..

 노년에 접어들며 진정한 ‘나’로 돌아가 죽음을 맞기 위해 자아를 찾아가는..

 그렇게 잠시 신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유아의 생리적 욕구 속에 머물다 돌아간다.

 이렇게 돈다.

 이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노년에 애정과 소속의 욕구 속에 머물려 하거나,

 자식의 테두리에서 안전의 욕구를 찾는 우를 범하곤 한다.

 반면에 욕구를 앞서가는 사람들은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이제 조용히 나만의 욕구 안에 머물고 싶다.

 다른 에너지가 나를 흔들지 않는..

 

 반응의 시간

 감정 반응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이 먼저인가 아니면 감정이…

 감각에 의한 무조건 반사는 아닌것 같다.

 생각, 의지, 반응.. 뭐 이런 순서라면,

 이 과정의 시간을 0.0001초 늘리면 되겠다.

 나는 생각의 자유를 갖고 있기에,

 느낌에서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반응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결정하고,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이 반응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 생각할 시간이 있을까?

 이런 이성적 반응은 주로 나쁜 일에 대한 반응이겠지.

 좋은 건 조개처럼 빨리 반응하고..

 

Rachmaninoff

 음악은 인생을 위해 충분하지만,

 인생은 음악을 위해 충분치 않다.

 

 세상에 대한 불만

 시간이 흐르면 왜 삶의 모든 빛깔은 바래지고,

 가볍고 평온하던 삶이 왜 쉴 새 없는 걱정에 시달릴까?

 불만족은 안락과 평온에서 오는 만족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감정이다.

 조건에 상관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꾸 세상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이는 커가며 세상에 더 많은 요구를 하며 배은망덕한 악동이 된다.

  “넌 나빠! 내가 원하는 걸 다 해줘야지!”

 부정적 태도로 불만족한 영혼과 마음이 투합한 강력한 힘으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그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하지만 세상은 단지 거울이다.

 거울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에게, 거울이라는 세상은 이별하는 연인처럼 슬프게 대답한다.

”원하시는대로 하세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뜻대로…“

 삶이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부정적 반응을 긍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스스로 다가와 나를 맞이한다.

 내 세계의 층을 창조한다.

 나의 세계는 나를 보호한다.

 내 주문을 이루어준다.

 세상은 나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를 알고 있다.

 내가 현실을 지배하지 않으면 현실이 나를 지배한다.

 

 마음의 짐

 늘 누군가의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도 짐이다.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이 진정 나약한 사람임을 알면, 연민으로 벗을 수 있으리라.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은 근원적으로 사람이다.

 물질적 무게도 그 원인으로 들어가면 관계성에 있다.

 관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것은 자신과의 거래만 하면 끝난다.

 나의 결단력에 반응하는 자신만 다스리면 된다.

 사실 나 이외의 모든 것은 물질이다.

 내가 물질로 존재하기에 그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먼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물질에 주눅들거나, 비교하거나 하면서 눌릴 필요가 없다.

 부모도 누르는 자가 되어서도 안되고, 거기에 눌려서도 안된다.

 제 2의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동등한 관계성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기 위해 그 많은 관계성에서 동등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 투쟁 안에는 사랑도 있어야 하고, 지혜도 있어야 하겠다.

 오늘도 마음의 짐을 찾아 던지고, 나의 에너지를 높여야겠다.

 

 내 존재에 대한 정의

 나는 뭐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우주는 늘 나를 위해 최고의 것을 준비하고 있다.

 내 내면은 고귀하고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다.

 나의 내면은 누가 만들었는가?

 몸은 부모로부터 왔지만, 이렇게 고귀한 내면은 어디서 왔는가?

 깊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환희와 행복감은 어디서 오는가?

 고귀함이란 영혼과 나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에너지를 의식할 수 있음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는 그대로 산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 또한 나의 고귀함이기에…

 

 나는 나를..

 나는 나를 아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무의식 세계의 형성에 대하여 아는가?

 그렇다면 이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깨야함을 아는가?

 나는 나를 믿는가?

 나는 나의 숨은 보석을 깊이 느끼는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유로운 나의 세계를 느끼는가?

 나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가?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내가 보는 거울 앞에 무엇이 비추어지는가?

 나는 나를 좋아하는가?

 ‘나는 내가 너무 좋아!‘ 라고 말할까?

 

 각자의 삶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 병원에서, 수도원에서..

 엄마도 침대 안에서 삶의 마지막을 열심히 견디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대신 할 수 없는 삶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규율도, 도덕도, 의무도, 관계성도, 죄책감도 없어야 한다.

 거지들을 보며, 환자들을 보며, 나는 무언가를 느껴야할 것은 없다.

 가족이라는 관계성에 너무 선을 굵게 긋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자루에 너무 많은 것들을 구겨 넣지 말아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에게 사회적 구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나를 살아야 하기에…

 놓아야 한다.

 나는 남을 위한 생이 아니기에…

 놓여져야 한다.

 

 AI 는 영혼이 없다

 어찌보면 그래서 AI는 마음에 속한다.

 마음은 모태부터 쌓여온 온갖 정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을 영혼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온갖 두려움과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스리기 위한

 오래된 사회적 제도, 규율과 의무, 도덕관들은,

 인생을 이런 부정적인 요소들로 채우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영혼과 일치하기 위해 생각을 바꾼다면,

 우리네 인생길은 훨씬 풍요롭고 행복할 것이다.

 마음과 영혼의 조화는 많은 것들을 창조한다.

 나의 마음을 내리 누르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 내려놓는다면,

 영혼이 나와 함께 춤추며 나를 이끌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알아보기만 해도 삶의 깊이는 달라진다.

 가끔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인간들을 만난다. 그럼 슬프다.

 영혼은

 말없는 목소리,

 생각없는 사유,

 울림없는 소리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

 마음이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저으며 허우적거리는 꼴을 바라보자.

 누군가의 제안을 거절한다.

 누군가의 말을 뿌리친다.

 누군가의 의견에 반박한다.

 누군가의 일의 방식을 내 방식대로 강요하려든다.

 나에게 주는 해결책을 거절한다.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얻으면 불만을 터뜨린다.

 내 시나리오에 어긋나면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전면공격을 감행한다.

 전략 바꾸기

 무게중심을 통제에서 관찰로 옮겨보자.

 흐름에 거슬러 허우적거리지 말자.

 내 삶이 흐름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자.

 흐름 자체를 조정하려고 애쓰지 말자.

 성급하게 뿌리치고, 거부하고, 반박하고, 밀어부치고,

 방해하고, 조정하고, 비판하지 말자. 

 관찰하며 상황이 스스로 해결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보자.

 내가 해야할 유일한 거스름은,

 내적, 외적 중요성의 수준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

 마음은 본능적이라 통제가 안되는 부분이라고..

 그래서 마음 가는대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모체라고.

 타고난 본능을 외부에 의해 교육되어져,

 조절하고 억제하는 행위는 생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에 의해 인간은 동물도 신도 될 수 있다고..

 사념체는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마음에서 발생한다고..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생각을 마음화 해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의지를 본능화 하는 작업은 무엇일까?

 의식을 무의식화 하는 일은 무엇인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아는데,

 긍정으로의 습관, 좋은 느낌 놓지않기, 빗나가는 생각들을 바꾸기..

 의지로 1분도 하기 힘든 이것들을 본능으로 바꾸라고..

 바꾸는 마음의 자세를 본능으로 만들기 위해 그 많은 자기 계발서가 있는게 아닌가..

 그러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는 과정 동안에 이미 원하는 것을 다 얻을 것 같다.

 인생이라는 시간이 올곧게만 가기엔 너무 길다.

 

 듦과 낢

 이 조화가 깨지면 존재가 비존재로 된다.

 이 조화의 진리는 자연 안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다.

 먹을 것을 추구하면, 그것들을 어떻게 내보내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부를 원하면, 그것을 나눌 것도 함께 원해야 한다.

 끊임없이 채워지는 독백들도, 뱉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지식은 쌓여서 독이되어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깨달음은 들어가서 사라지기 때문에 나올 것도 없으니…

 나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내비치는 거울을 봐야하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채워도 채워도 비워지는 것들로…

 나를 정화시키는 것들로…

 음악 듣기와 예술품 감상, 운동…

 좋은 느낌만 남기고 사라지는…

 

 괴물

 난 가끔 나이가 들어가며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본다.

 그러면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예전에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신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혜가 생기고, 생각이 자유로와지고,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관용이 생기고..

 많은 것을 내려놓을 줄 알고..

 내면의 깊이가 두터워지는..

 오감을 초월하여 육감이 발달되어 남을 위한 배려가 많아지는..

 이쯤되면 신인가, 괴물인가?

 나역시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것들이 육감까지 동원되어 인지되어지곤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내면이 괴물로 느껴진다.

 지혜는 타인의 판단과 자신의 우월감으로 둔갑하고,

 관용과 여유로움은 아주 잘 만들어진 위선이 되고,

 발달되어진 인지 능력은 타인을 이용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어떤 관계에서든 적용되는 이 무기를 피하는 길은,

 ‘나‘를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다.

 나도 그 누군가에게 늘 감시당하고 인지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부분이 왜곡된채로…

 알면서 모른척 하는 것은 아픈 일인데,

 이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직 ‘어린 아이‘ 이고, ’젖은 나무‘ 이다.

 그 아픔이 사라지면 괴물이다.

 삶 안에서 그 어디에도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면,

 신도 괴물도 아닌 ’나‘ 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Airdrop

 같은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는 내 영혼이

 나에게 주는 메세지..

 내가 영혼에게 보내는 메세지..

 내가 깨어 있지 않으면 오는 것을 받을 수가 없다.

 오늘도 감사할 거리를 나에게 나열하고 있다.

 잘 될 거라 믿으라고도 한다.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 열릴거라고..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과 환희를 느끼라고..

 밀려오는 행복을 느끼라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나는 64년 전 지구에 온 손님이었다 (05/05/2024)

 생명은 이 지구에 오는 손님이다.

 어느 부모의 손님으로 태어난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생의 항로에 배를 한 척 띄우는 일이다.

 어떤 배를 만들어갈 지 서로 의논하며…

 때론 거센 파도와 비바람도 만날 것이고,

 따스한 태양을 맞으며, 최고의 행복감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아기라는 손님이 오게 된다.

 그 아기손님이 자기만의 배를 만들어 나갈때까지,

 안전한 배 안에서 잘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 아기는 내 것도 아니요, 내 배를 책임져야 할 사람도 아니다.

 그저 귀한 손님일 뿐..

 그도 자신의 배를 만들어 또다른 손님을 맞이할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지내던 손님이 떠나가고,

 텅 빈 듯한 배를 지키며 그 손님이 다녀가길 기다리겠지.

 이런 자연의 순환 속에서 지금 나는 선장이다.

 너무 가까이

 내 생각의 속삭임을 듣는 이가 너무 가까이 있다.

 무언가에 중요성이 커지면 그것을 금새 알아차리고

 가차없이 그에 맞서는 일을 만들어준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냐는듯이..

 외적 중요성이 강하면 광신자가 되고,

 내적 중요성이 강하면 백치가 된다고..

 그래서 원하지도 말고 희망하지도 말고 다만 의도하라고..

 나의 생각을 듣는 이가 발을 걸지 않도록..

 다른 주파수로 흔들려 공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두려움을 자신감으로,

 우울을 열정으로,

 분노를 담담함으로,

 짜증을 기쁨으로 바꾸라고 한다.

 재빨리 바꾸지 않으면 그 사이 또 뭔가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아주 가까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를 속여야겠다.

 속이다보면 그것이 참이 되어 자리잡고 나를 지킬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것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는 것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몸짓으로 반평생을 살고,

 또 그리 자유롭지 못한 채로 반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것이다.

 심신을 건강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함께 하는 이에겐 큰 선물이다.

 이 엄청난 책임을 행복한 삶만을 꿈꾸며 덥썩 껴안는 건 도박이다.

 노화라는 것은 삶의 질이 떨어지는 일인데,

 함께 꼭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고,

 서로가 지켜봐야 하는 길이고,

 도망칠 수 없는 길이다.

 동물로 태어나 언젠가 식물이 되고 급기야 흙이 되는 길.

 함께 한다는 것은,

 이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한 땀 한 땀

 피아노 건반 위를 걷고 뛰어다니는 손가락들도,

 사색의 산물을 갈고 닦아 진주알들을 써내려간 글들도,

 마음에서 생각으로 만들어 더듬거리며 나오는 말들도,

 생각에 지혜와 용기를 버무려 실천하는 행동들도,

 수많은 감정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타나는 순간적인 표정들과 몸짓들도,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는 자연의 완벽함들도,

 그 모두가 한 땀 한 땀들의 결실들이다.

 그래서 느낄 때도, 반응할 때도, 그 모두를 대할 때도

 한 땀 한 땀 그 정성으로 느끼고, 반응하고, 대해야 한다.

 내가 아는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기에…

 물론 남의 것을 모두 하찮은 것이라 생각하고, 대하는 동물들도 있다.

 내 시간에 그런 것까지 담아내고 싶진 않다.

 귀한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

 

 영혼의 속도

 나의 속도는 어느정도일까?

 피아노의 선율과 박자의 조화는

 작곡자와 그를 치는 사람의 영혼이 일치를 이룰 때 완성된다.

 나를 위해 작곡된 내 인생의 선율과 박자는 무엇일까?

 피아니스트가 그를 위해 고민하듯,

 나 또한 나를 위해 작곡된 박자와 선율을 찾으며 가야 한다.

 화장을 할 때,

 얼굴 맛사지를 할 때,

 운전을 할 때,

 말을 할 때,

 화를 낼 때,

 평온이 깨지고 부교감신경이 불안정해질 때,

 내 생각과 몸은 박자를 잃고, 영혼을 잊는다.

 무엇을 하든 내 박자를 의식하고,

 영혼이 이끄는대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며 가야 한다.

 때론 느리게, 때론 신들린 듯…

 내 생각에 쫓겨 다급하게 움직일 땐,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고 심호흡을 하며 느낄 준비를 하자.

 지금 나는 영혼과 함께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는다.

 

 나무늘보는 나무였을까?

 나무가 움직이기를 간절히 바래서 뿌리가 다리가 되어…

 뿌리의 끝은 움직인다.

 그 강인한 힘은 바위도 들어올리고 집도 들어 올린다.

 내 몸 안에도 뿌리가 자란다.

 각 부분에서 세포의 끝은 자라고 없어지고 하며 나를 만들어간다.

 생각의 뿌리는 공간을 넘어 어디론가 계속 벋어나간다.

 살면서 계속 바뀌는 무대장치에 맞추어 그에 맞는 배역을 해내야 한다.

 그 시간에 맞는 또다른 뿌리를 내리며…

 그래서 빈 공간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가버린 공간도,

 갑자기 텅 비어진 시간들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나무가 되어서도,

 뭔가로 채우고야 만다.

 오래 헤어져 있다 만난 사람에서 이미 다른 뭔가로 채워짐을 느낄 때,

 그 사람의 시간의 공간을 가늠해보며 기쁘기도 하고,

 그 시간이 멈추어 있었던 것처럼 그대로이면 슬프기도 하다.

 매일 매일 내리는 그 뿌리가 늘 신선하고 촉촉하고 어렸으면 좋겠다.

 늘 뿌리의 끝처럼 살아있기를…

 벋어나가는 가지의 끝처럼…

 어느 방향으로 벋어갈 지 정하는 것이 의식을 갖고 할 일이다.

 그래서 나무가 나무늘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밤하늘의 한 곳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한한 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하늘을 채운다.

 꽃의 깊은 안을 들여다보면,

 무수한 꽃가루와 거기를 다녀간 벌들과 나비들이 보인다.

 거목의 껍질을 들여다보면,

 그 벌어진 사이로 강인한 생명력과 무수한 곤충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음악의 선율 사이사이로 그를 만드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림 안에서는 수없이 스쳤을 생각들과 붓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에선 만든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손길이 보인다.

 노인의 깊은 주름에선 인고의 냄새와 연민이 느껴진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진정 이해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든 다 알것 같아 그저 웃음만이 흐른다.

 순수한 실수도 아름답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변색되어진다.

 느낌은 걸러지지 않고 훅~ 들어오기에 매섭다.

 그래서 우리 세상은 느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꾸며지지 않은 순수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저 아름답다.

 

 생의 마디

 지내온 시간의 마디들을 돌아보며,

 그 때마다 내가 선택했던 시간들, 사람들 그리고 일들..

 그것은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한 생존의 선택들이었다.

 그것이 비록 빈둥대는 시간들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마디는 견디기 힘들었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고,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그 마디에 무엇을 선택했었나 돌아본다.

 선택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거의 남아있고,

 술과 이야기들은 날아갔고,

 일은 몇차례 바뀌었고,

 종교는 일찍 졸업했고,

 그래도 돌아보면 사람들이 많은 위로가 되었었다.

 진심어린 그들의 사랑이…

 지금 나는 또다른 마디 위에 서 있다.

 내 마음의 똥을 치우고,

 톡하면 터져버릴 눈물을 머금고 목까지 차오른 서글픔을 녹여내고 있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많은 사람들도,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괜찮다를 외치며 안괜찮음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지금 나와 함께 여기서 겨울을 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임윤찬의 영혼을 선택했다.

 나의 생존을 위한 선택.

 내가 깨어 있는 시간동안 늘 함께 한다.

 지금껏 선택한 사람들을 간직했듯이 그의 음악도 내 생애동안 함께 할 것이다.

 이 시간에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한다.

 

 성의라는 것

 성의가 없다는 느낌은,

 자기 뇌의 구조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깊은 사고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집어던지듯이 말하면서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것.

 머리는 다른 데에 있고 손만 움직이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다면,

 나는 어떤 때에 성의를 느끼며 감동하는가?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의식했다고 모두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 그것인지는 알아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손이 가는 길을 묵묵히 집중해서 보는 것.

 엄지 손가락으로 한번 더 눌러주는 손길.

 도의 기본이 내 손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성의는 도의 기본인가..

 내 생각이 가는 길을 들여다보고,

 내 말이 허공에 없어지지 않게 던지지 말고 건네고,

 내 행동이 보여지는 성의가 되지 않도록 생각을 한 곳으로 모으고,

 말에서, 손길에서, 걸음걸이에서…

 그 모든 것은 마음 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라,

 마음에 성의를 품고 있으면 모든 것이 나타난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깊은 감동도, 아쉬움도, 분노도, 연민도 느낀다.

 나는 오늘도 성의를 다해 순간을 잡으려 노력한다.

 자동차 핸들과 칼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보며,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면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딸과 어머니

 어머니가 끝나고 딸이 시작되는 시점은?

 위로는 어머니, 그리고 나, 내 딸들…

 딸로서 모든 것들을 참고, 숨기고, 말을 삼키고 살았던 시간들..

 그 시간이 나에겐 길었다.

 내가 딸들을 낳고 기르고, 딸들이 나처럼 그 시간들을 견디는 것도 보고,

 그들이 참지말고, 할 말을 하고 살게 하려 애썼지만,

 어린 시절의 통제와 위압적인 것들은 살에 박혀, 그리 쉽진 않을 것이다.

 딸들이 내 위에 있지는 않았기에..

 나는 이제 40년만에 함께 살게 되며 한을 풀고 있다.

 독백으로 삼켰던 많은 말들을 한껏 풀고,

 못해드렸던 것들도 실컷 해드리면서..

 딸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이 나이에 딸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가두어 두는 괴물이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는 복잡하다.

 어머니의 원형은 ‘위대한 어머니’와 ‘공포의 어머니’ 이 두 모습이다.

 모성 공포증, 이것은 어머니의 자라온 환경과 강박과 열등의식 등 복잡함이 만들어낸다.

 어머니와 딸이 서로 공포스러운 존재로 되는..

 부러움과 질투 때문에 딸을 구속하려는 어머니..

 좋은 어머니가 위험한 이유는 거부하기 힘든 유대감과 떠날 수 없는 에덴 동산,

 그런 어머니에 대한 거부는 죄책감을 낳는다.

 좋은 어머니도, 공포스러운 어머니도, 위대한 어머니도 아니기 위해 뭘 해야 하는것도 아니다.

 딸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아닌 그저 한 동굴에 모여사는 생각 적은 동물로, 살다 가면 좋겠다.

 

 비움의 충만함

 그냥 편해서 지니고 다니는 생각, 관념, 이미지..

 이런 익숙한 정신적 구조를 포기할 때,

 매일 저절로 반복되는 생각들이 만든 깊은 틀을 자각할 때,

 그 때 새로운 것에 자신을 열 수 있다.

 강박적으로 하던 일을 잠시 멈출 때,

 자신이 세상과 멀어져 있음을 알아차릴 때,

 놓아버림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다시 나 자신과 연결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놓아버림을 추구한다면, 영적인 연쇄 살인자가 되어야 한다고..

 먼저 자신의 에고를 죽이고, 부모로부터의 전통을 죽이고, 내 안의 신을 죽여야 한다고..

 살인은 비움의 원천이다.

 생각이 비워질 때, 신성의 공간이 생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없애면 다른 것을 위한 자리가 생긴다.

 삶을 이해하지 않아야 삶이 축제가 된다고..

 명상은 바로 여기, 이 현실에 더 자주 돌아오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연습이라고..

 우리는 현실이 아닌 내게 입력된 이론과 개념에서 나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자신을 속이려면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신을 속이려면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이

 사이가 없다는 건?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짧은 시간,

 아기가 자기의 심장을 갖기 전까지의 기간,

 살고 있는 한 공기는 늘 닿아있고..

 어딘가에 닿아있는 순간 외에는 사이가 늘 있다.

 정신적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공기처럼 늘 존재하는 에너지가 그 사이에 있다.

 투명한 선으로 연결되어진 사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그래서 불안정한 그 사이를 온갖 사회적 끈으로 꽁꽁 묶어 그 사이들에 엮어 놓았다.

 탯줄의 분리에 대한 본능적 불안감이 그 끈들을 잡게 한다. 그리고 또 자유를 갈망한다.

 그 자유는 모태 안에서의 노닐던 그것일까,

 아니면 알지 못하는 그 이전의 것일까?

 탯줄은 끊었지만 그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끊지 못하는 새로운 줄이 생긴다.

 이 사회의 끈들을 의식하는 순간 그때부터 숨이 막혀오고 벗어나려 소리없는 아우성을 친다.

 사이가 없어지는 건 죽음이다.

 모든 이어진 에너지와 끈들이 없어지는..

 텅 빈 사이의 자유로움을 살아서도 맛보고.

 그 사이에서 노니는 호사를 꿈꿔본다.  

 

 의도

 마음과 행동 사이에 의도가 있다.

 이 의도는 이미 행동으로 옮긴거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의도를 한다면 이미 이룬 것이다.

 힘들어 하는 누군가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면 이미 받은 것이다.

 용서를 위한 마음으로 그에게 글을 쓴다면 이미 그는 받은 것이다.

 식당 앞에 소꿉놀이 하듯 정성스레 담아 놓아 둔 것은 이미 자신에게 의도한 것이다.

 감사의 표현으로 봉투를 준비하는 그 의도에 이미 전달이 된 것이다.

 마음에서 생각으로, 또 그 의도에서 행동으로 하는 이 과정에서,

 생각과 의도의 차이는 아주 크다.

 생각에서 끝내면 늘 마음 한 자리에 남아 나를 괴롭힐 수 있다.

 의도가 행동까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에너지는 방사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도 외부적 의도가 인도한다.

 나의 판단과 결정이 행동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오만일 수도 있다.

 못드시는 엄마를 위해 두부 한 조각을 그릇에 담으며,

 의도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것을 보며 나를 위한 의도였음도 알게 되었다.

 아마 엄마도 조금은 드셨으리라..

 그리고 마음이 조금 더 푸근해지셨으리라..

 내 마음처럼…

 

Facts of the Potentiality

 나의 우주

 움직이는 우주

 생성과 소멸의 우주

 이 모든 것이 자력의 끌어당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런 요소들이 존재하기에,

 나의 가능태가 존재한다.

 나의 의도가 닿을 수 있는 그 곳.

 내 의도가 나의 태양계를 만들어간다.

 우주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큰 가능성인 것이다.

 우주가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큰 축복이고 기회인 것이다.

 ‘나’ 라는 우주는 많은 요소들로 움직이고,

 소멸될 때까지 움직임과 팽창은 계속 할 것이다.

 나의 생성은 자궁에서 시작됐고,

 소멸을 위한 팽창은 일생을 통해 일어나고,

 그 팽창을 위한 고뇌와 희열과 행복이 있어야 했었고,

 그 팽창의 과정에 나의 의도가 작용을 했을 것이고,

 팽창되어지는 것이 아닌 팽창을 시킬 수 있다는 potentiality.

 그래서, 작은 나비의 몸짓이 나의 태양계의 형태를 변형시킨다.

 이 몸짓은 지금도 매일, 매순간 의식 안에서 의도되어지고 있고,

 나의 태양계는 더욱 넓어지고 강해지고 있다.

 의식적 팽창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움직여가고 있고,

 그것은 내적, 외적으로 엄청난 풍요로움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 풍요로움은 느낄 수 있는 자만의 특권이다.

 대신 해줄 수 없는.. 멱여줄 수 없는..

 그것은 그를 위한 노력의 시간들에 대한 큰 보상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싶은가를 생각하며 시간들을 선택해야 한다.

 남들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을 만들며..

 

 여유라는 것은

 남아도는 것

 차고 넘치는 것

 가진 것이 많다는 것

 가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

 달인이 되는 것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

 즐기는 것

 다른 이가 그 여유를 인정하는 것

 겸손할 수 있다는 것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

 관대할 수 있다는 것

 내 손 안에 들어 있다는 것

 여유가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여유는 자신감이다.

 

 내가 선택한 것들

 내게 선택되어진 것들은 부모와 형제들, 환경…

 그것조차도 나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 혼자만의 시간들이 주어지기 시작한 날부터 아마도 나는 선택을 시작했을 것이다.

 무엇을 하며 놀 것인지,

 누구랑 놀 것인지,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공부대신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전공하고 싶은지,

 나는 누구인지,

 누구와 사랑할 것인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누구와 친구할 것인지,

 나의 인생관은 무엇인지,

 어느새 선택되어지는 시간들이 다시 오고,

 정신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다시 나만의 시간을 선택할 때가 온다.

 이젠 알몸으로 나의 시간들을 선택하고 싶다.

 싫어할 권리, 아니라고 할 권리, 의무도 피할 권리,

 이걸 선택하고 싶다.

 나는 이제 자유를 선택하고, 행복을 선택한다.

 무엇을 할 때 자유롭고 행복한지 느끼면서…

 

 선택할 자유

 자유는 선택할 것이 아니었다.

 자유는 선택을 위한 도구이자 이미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누가 가져갔는가?

 인간이 가져갔겠지.

 그런 사악함은 인간만이 가졌으니..

 자연이 나의 자유를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우주는 나에게 자유를 부여했으니 도로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고..

 죽을때까지 자유를 갈구하며 살게 만드는..

 이 자유를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삶이 아닐까..

 태어나면서 포대기에 싸이고,

 그 뒤로 하나씩 더해지는 끈들로 점점 나는 감춰지고..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보인다.

 인간이 가장 불행한 동물일까?

 지금은 전자망이 지구를 동여매고 있다.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게..

 거대한 실타래 안에서 자유를 꿈꾼다.

 주어졌던 자유를,

 내가 들어앉아 있는 여기에서,

 지금, 단숨에 얻으려한다.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든 고치를 녹여내는…

 이미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잊었다.

 이제 뭐든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무소의 뿔

 가끔 이 뿔을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에게서 실망감이나 구토가 일어날 때..

 그래서 자신 안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낄 때가 있다.

 귀막고 눈막고 입막고 있는 원숭이처럼..

 그 어디에도 나를 열고 싶은 곳이 없는..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고..

 입만 열어 놓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가끔 눈과 귀를 막으려 눈감고 피아노를 듣는다.

 이것들을 적절하게 조율할 수 없는 사람들은 도피한다.

 

 가능태의 다양성

 현실의 형체 속에는 반드시 그 근원이 있다.

 물질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법칙이 따른다.

 무한의 DNA 결합과 그 안에 존재하는 정보체는 우주의 그 법칙에 따른다.

 그것에 미묘하게 작용하는 환경의 요인과 나의 반응까지 합쳐지면 나는 그 모두를 품고 있는 무한의 별이다.

 순간순간에 선택을 했든, 선택되어졌든 나는 그 다음의 선택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모여 지금 여기 있다.

 그 순간들이란 사건이다.

 사건이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바로 그 사건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이 나의 운명을 바꾼다.

 어떤 사건이든 그것은 기회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골라잡기를 해야 한다.

 그 선택을 결정하기까지 나의 가치관, 환경, 형성되어진 성격, 이 모두가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모두를 무시하고, 백화점에서 갖고싶은 물건을 고르듯 최고의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내가 원하는 운명으로 인도될 것이다.

 궤도의 이탈은 사건에서 또다른 선택을 했을 때에 일어난다.

 선택을 위한 사건이라는 일들은 작게도, 크게도 나를 두드린다.

 그 때마다 깨어있어 소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만질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만질 수 없는 에너지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을 얻는다.

 무한한 가능태가 이미 존재하므로, 나는 당연히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정적이다.

 인생의 필름을 전부 펼쳐놓고 모든 장면을 동시에 바라보면,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모든 장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파도는 물의 덩어리가 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위치에너지의 상태이다.

 그래서 지나온 사건과 일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파도에 흔들였던 그 자리에..

 마치 영화 필름처럼 존재한다.

 수없이 지나가는 인생의 파고에서 나는 무엇을 남기고 왔는가?

 그 기억이 만들어내는 다음 파고는 무엇일까?

 그래서 좋은 것만을 남겨야 한다. 다음을 위해..

 만질 수 없는 행복, 환희, 기쁨, 벅차오름..

 이런 것들로 다음을 맞는다면 이들이 만질 수 있는 것들로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자코모 레오파르디-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모든 것을 본다.

 반면 어른들은 모든 것을 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들을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라

 이는 그들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 투사했던 나의 기대를 버리라는 말이다.

 나의 내면의 존재, 중심, 신조를 찾고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내면으로..

 그림자를 없애고, 본연의 내면으로..

 무덤에서 나와 내가 내 무덤을 벌초하는 일이다.

 그러고나서 나는 무엇을 할까?

 그 어떤 것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다면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욕망은 거짓이고, 두려움이기에 심장만 뛰게 만든다.

 자신의 행복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얻어내려고 싸울 필요가 없다.

 그저 사념을 원하는 다른 형태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그들의 의한 나가 아닌 나의 나로…

 

 나무가 되어

 지금 임윤찬이 연주하는 바흐를 듣고 있다.

 내가 임윤찬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 연주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음을 찾는것도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내가 추구하는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건 무시하고 건너뛰고, 다시 그것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주어진 생은 희생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보이기 위해 낭비되어서도 안된다.

 어떤 순간엔 내가 나무처럼 너무나 강인하게 느껴진다.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크다보면 어느새 숲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그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있고,

 견딘 세월이 있고,

 그 누구도 알아줄 수 없는 생명의 비밀이 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그냥 느낌으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으면 행복이 스친다.

 뿌리내린 곳과 번개와 비바람이 치는 환경 속에서 지금 살아 있다면,

 나는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걸 품은…

 

 얼룩말의 검은 줄무늬 없애기

 성공의 물결은 내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성공의 물결은 우연의 일치처럼 한꺼번에 일어난다.

 이는 헤엄치다 지쳐버린 사람을 해변으로 데려다주는 파도와 비유할 수 있다.

 성공의 물결은 일시적인 구조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이것은 흘러가지 않고 정적으로 존재한다.

 그레서 단지 내 삶 속에 성공의 물결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펜듈럼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나의 선택과 받아들임이 날아가버린다.

 

 성공의 전령

 미래는 지금의 생각에 달려 있다.

 새 집을 원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좋은 점들을 찾아내고 감사하자.

 그리고 미래의 집을 그려보고, 그 안에 들어갈 가구들을 고르자.

 이 생각은 부메랑처럼 반드시 되돌아온다.

 부정적 에너지를 막는 일보다 내 자신이 그런 에너지를 방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든 기쁘고 좋아하는 것을 읽거나 듣거든 당장 그것을 내 생각에다 들여놓고 행복을 느끼자.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기뻐한다.

 지금 ‘황제’와 함께 벅차게 행복하다.

 좋은 소식은 음미하고 나쁜 소식엔 문을 닫는다.

 이런 습관의 변화들은 긍정적 성공의 물결에 앞서 오는 전령이다.

 좋은 소식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그를 추적하자.

 

 죄책감이라는 쓰레기

 즉시 죄책감이라는 쓰레기로부터 벗어나자.

 잘못이 없으니 처벌도 없다.

 나를 정당화하는 짓도 그만두자.

 누구에게도 무엇도 빚지지 않았고,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죄책감은 타인의 시선이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면 ‘나’라는 거대한 하얀 벽을 만난다.

 군중 속에서의 하얀 벽을 찾아 그 안에 머무르는 일,

 그것이 자유로의 통로이다.

 눈을 뜨면 이미 타인의 타임라인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일상..

 타인이 나를 잡고 있는 시간들..

 타인이 나를 이용하는 시간들..

 나의 벽을 찾아 느끼는 순간 또다른 불안이 자리하고..

 이것은 내 삶의 악순환이다.

 세상을 살며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도 없고,

 모든 이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모두에게 잘 할 필요도 없고,

 남의 판단에 내 감정이 흔들릴 필요도 없고,

 환희를 공유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하얀 벽 앞에 설 수 있고,

 그 벽 앞에서 환희를 느낄 수 있고,

 거기서 무한한 우주를 볼 수 있고,

 그 순간의 시간 안에서 나무늘보처럼 걷고 싶다.

 삶 속에서 좋아하는 한 과목만을 하며 살고 싶다.

 역할의 다양성 안에서 나를 버려야하고,

 대신 온갖 쓰레기같은 감정을 안고 살기엔 생이 너무 아쉽다.

 

 요람속의 서툼

 말하는 것이 서툴다고 생각도 서툰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많다고 서툰것도 아니다.

 서툴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그 인격이 서툰 것이다.

 서툼 안에서 생각을 고를 수 있다.

 서툼에서 겸손의 미덕이 생긴다면 그건 덤이다.

 아이는 모든 게 서툴다.

 그래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서툴다는 것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면 좋겠다.

 어느 순간 그 서툼을 알아차릴 때,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음을 알아버린 것과 같다.

 그 다음부터는 그것들을 감추기 위한 생각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몸 하나 가리는 것은 쉽지만,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어떻게 감출 것인가..

 그래서 어린 아이와 같이 천진하게 나아가고 싶다.

 설사 나의 서툼을 알아차리더라도 감추려 하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며 환희를 느끼고 받아들이면 그 뿐이다.

 그 외에 것들은 타인의 몫이다.

 나는 다시 서툼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왠지 그 안은 아기 요람같이 포근할 것 같다.

 그 안의 아기를 바라봐주는 사람은 하나면 충분하고..

 한 친구를 생각하며 글을 써본다.

 

 지금의 에너지

 지금의 생각이 내일의, 아니 바로 앞의 나를 만든다고 한다.

 에너지 차원에서는 모든 물질적 대상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단지 내가 그것들에 특정한 속성을 부여했을 뿐이라고.

 좋으면 나쁨을 생각하고, 행복하면 불안함을 생각하고,

 선한 생각 뒤에는 억울함과 보상을 생각한다.

 늘 상대적 감정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느낌에는 죄가 없다고 한다.

 느낌은 어디서 오는걸까?

 DNA 에서부터 오는걸까?

 생각은 학습되어진 것이고,

 느낌과 생각의 사이가 찰라라면 그것을 의지로 바꿀 수가 있을까?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느끼는거라면,

 느낌의 에너지가 이미 무언가를 방사하고 난 후,

 난 다시 생각으로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하는건가?

 느낌도 생각도 모두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면,

 느낌이 좋지 않아도 좋은 생각으로 에너지를 바꾸는 일이 필요하겠다.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어떤 에너지든 내보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나의 느낌도 생각도 점검하는 중이다.

 

 고이지 않는 물처럼

 인생은 늘 움직이는 사건의 연속이다.

 이 안에서 정신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다 죽는다.

 그래서 늘 새롭다.

 죽음도 새롭다.

 전생을 기억하며 100번쯤 환생한다면 아주 잘 살아질까?

 그러나 그 때마다 환경이 달라져 새롭긴 마찬가지일거다.

 비슷한 상황이 되면 같은 실수를 하며 비슷한 삶을 살아가겠지.

 이 살덩이로 된 동물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알몸으로..

 그렇다면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덕분에 옷들이 넘쳐나고, 명품의 교묘한 상술까지..

 인간의 교묘함은 끝이 없다.

 쥐는 옷을 입지 않았는데도, 서울쥐와 시골쥐가 다르다.

 인간도 옷을 벗으면 환경으로 구분지어질까?

 무엇으로 자기가 잘난걸 나타내려 할까?

 말로 내면의 모든 걸 설명하기엔 너무 장황하고 시간도 없다.

 말을 안해도 옷과 집과 차, 악세사리로 대충 판단되어지는데..

 그런데 그걸 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슬프다.

 그래서 슬픈 인간이 되기싫어 기를 쓰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러다 인생은 마감될 것이고..

 인간이 옷을 벗으면, 몸으로 과시하려 스포츠센터가 더 발달했을까?

 인간의 뇌는 무한대라 물이 고일 틈이 없다.

 그래서 살아볼 만 하고…

 

 나를 빌려주기

 내가 하고싶은 일은?

 미슐랭 식당에 가서 먹고싶은 것을 먹기.

 샤넬에서 입고싶은 옷을 사기.

 새로 지은 넓은 집의 데크에서 친구들과 석양을 바라보며 와인 마시기.

 마이바흐 SUV 를 타고 이 가을에 쉐난도우를 향해 달리기.

 흔히 말하는 의식주에다 자동차가 더해졌다.

 갖고싶은 것은 멈추어져 있지만,

 하고 싶은 것은 움직인다.

 하루의 동선을 살펴보면 집안에서 수없이 왔다갔다 하고,

 밖에 나가면 차 안에서 반을 보내고,

 아니면 거의 돈버는 일을하며 시간을 보내겠지.

 설사 시간이 되어 산책을 한다 해도 머릿속은 온갖 해야 할 일들과 고민으로 가득할 테고..

 나는 나를 어디에 빌려주고 있는가?

 나를 빌려주는 시간에는 나의 머리와 손만 내어주라고 한다.

 가슴은 주어서는 안된다고..

 나는 그 일만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대신, 일을 할 때는 흠잡을 데 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일은 집이든 헛간이든 내 내면이 눈을 통해 바라보는 일은 같다.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집이든 헛간이든 같은 꿈 속을 헤맬것이고..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가슴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눈으로 밖을 볼 것이다.

 삶에 나를 빌려주면서..

 

 내가 원할 때까지

 눈을 감고 멀리 상념 속에 있을 때,

 눈을 뜨고 싶을 때까지 감고 있으면 좋겠다.

 볼 수 있는 눈에 감사하는데, 왜 감고 싶을까?

 멈춰 있는 나의 손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움직이고 싶을 때까지 멈췄으면 좋겠다.

 기쁨이, 환희가, 행복들이 이제 그만, 다음에 또 라고 할 때까지 머무르면 좋겠다.

 그런데 늘 소리가 나를 깨운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 음악을 크게 틀어도 들린다.

 내면의 소리가 제일 시끄럽다.

 시계의 초침이 늘 째깍거린다.

 내가 원할 때까지 뭔가를 할 수 없다.

 소리의 진공 상태에서 몰두하고 싶다.

 나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소유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몰두하고 싶다.

 

 원초적 렌즈

 아기의 렌즈는 움직이는 거울이다.

 보이는대로 느끼고 행동하는..

 마치 화가가 크로키로 스케치하듯 순간을 잡는다.

 그리고 잊을 건 잊고 기억으로 남는건 소프트웨어에 저장되겠지.

 이런 원초적 렌즈를 AI 의 렌즈로 바꾸어 가는 걸 교육이라고 하던가..

 이 렌즈를 커서까지 고수하게 되면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고..

 원초적 렌즈를 가진 아이는 판단없이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부끄럼없이 반응해낸다.

 내가 어떻게 비추어지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누워있다 일어나 공간 이동이 시작되면 아이는 자기의 행동에 반응하는 어른들의 몸짓과 표정과 목소리의 톤으로 감지하며 자신의 알몸을 알아채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른들을 시험하기 시작한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다.

 늘 같은 반응이면 입력이 끝나고 다른 행동으로 들어가 또 반응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 아이에게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마치 그런 행동이 아이의 의지에서 나온것처럼..

 환생은 한 생애에서 일어난다.

 원초적 렌즈가 사라지고 AI 로 살아가다 다시 요람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그 안에서 원초적 렌즈의 향수를 안고, 이미 다 아는 반응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나를 지켜보는 이를 내가 전에 지켜봤었기에 이미 그 반응을 알고 있다.

 이제 알아도 모른척 하는 법을 터득하고 반응을 최소화 하는 법을 배우면 아주 안락한 마지막 요람에서 수명을 다 한 AI 가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의 악덕

 에너지 차원에서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오직 자연의 법칙에 복종하는 사람과 ‘현상태’를 뒤흔드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습관적인 사람에 대한 비판은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이다.

 나는 그런 비판을 할 권리가 없다.

 비판 받을 해를 끼친 사람은 균형의 힘이 그에게 마땅한 것을 받게 할 것이다.

 내가 거기에 끼어들어 불균형에의 도구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면 나는 더 선한 사람이 되어 날개 달린 천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멸은 가장 위험한 형태의 비난이다.

 그 경멸의 그늘엔 강한 질투나 우월감 같은 더 나쁜 감정들이 숨어 있어, 강한 균형력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처지로 된다는 것이다.

 경멸과 허영은 인간의 악덕이다.

 식물과 동물의 위대함은 그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의식은 인간에게 유용한 장점들을 많이 가져다 주었지만 허영심, 경멸, 죄책감과 열등감 같은 쓰레기들도 함께 주었다. 

 

 나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들리는데 나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주파수에 따라 들릴 수도,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자극이라도 사람들의 민감도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다르다.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많은 의식과 느낌들의 차이는 도식화 될 수 없다.

 내가 들리는만큼만 안다.

 내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

 모든 판단과 의식은 내 크기만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만 의식하고,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 반응이 다르면 틀린다고 생각하고 비난한다.

 내가 모든 걸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다른 이들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환청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누구는 듣는다.

 그것을 다른 이에게 왜 저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다구치면 그건 사고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것은 환청이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정상이면 다른 사람이 비정상이 되어야 한다.

 같은 음악이 반복되어 들리고, 끊이지 않아 고통을 호소한다.

 제발 저 음악을 멈추게 해달라며…

 베토벤은 들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작곡을 했다.

 그렇다면 그는 환청을 만들어내어 악보에 적었을까?

 환청이나 환상은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실인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 내가 정상인 것이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도대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란 말인가?

 갑자기 내가 정상이라고 말하기가 두려워진다.

 

 그냥 걸어 들어간다

 나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새로운 track 으로 이동중이다.

 내 의지없이 의도만 갖고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 안 저멀리의 아름다움만 바라보며…

 앞에선 절대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

 반대로 돌아서 밖을 보니 전혀 다른 곳이 보인다.

 반대의 track 으로 옮길 수 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발을 떼려는 결심의 용기,

 그 곳을 보기 위해 눈을 뜰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가기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

 용기를 내기 위해 탈진된 상태로 터벅터벅 걷는다.

 그 곳을 향해 그냥…

 

 죽었던 영혼들이 다시 깨어나다

 자의든 타의든 어떤 형태의 이별도 죽음이다.

 그 관계성의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또 다른 세계로의 출발이고,

 이별도 또 다른 만남들의 시작이다.

 만남의 부활이 시작되기도 하는..

 기묘한 것은 그 시점에 발산되는 에너지들의 움직임이다.

 잠자고 있던 영혼들의 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힘을 잃어가면 좀비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드는 것처럼,

 나의 좋은 기운이 발산되는 것을 알아채는 영혼들은

 나를 향해 다시 모여든다.

 이젠 나의 동맹군들이 나를 지켜줄 차례다.

 죽음에서 부활해도 다시 예전의 관계성은 아닌 것이다.

 그 시간만큼 성숙해졌기에…

 또다시 이별을 선고해야 하기에는 이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지혜와 의식과 용기를 내 동맹군으로 대동해야 한다.

 사려깊게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외부의 지켜보는 의도들을 의식하고, 나도 지켜봐야 한다.

 아기로 태어나 처음 눈을 떠서 보이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부활의 첫 시선에서는 많은 것들이 감지되리라.

 그것은 또다른 설레임이고, 두려움이다.

 그것은 나만의 맘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그럴 것이다.

 거침없이 불로 뛰어들었던 나방이 부활하는 것이다.

 이젠 의연한 나비가 되어..

 이런 시간들이 있음에, 그리고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겨울의 나목 사이로 흰구름과 파란 하늘이 있다.

 생각과 말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느낌과 생각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과 행동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행동할 수 없다면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가..

 느낌과 느낌, 생각과 생각, 행동과 행동 사이에도 무언가 있다.

 찰나라고 하는 영겁 안에…

 내 안에, 그리고 행동하는 나와 또 그를 지켜보는 내가 있다.

 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리고 주변인들이 나를 어떻게 느끼고 판단하는지도 어렴풋이 알겠는데,

 나도 나를 알고싶지 않고, 남도 나를 알고 느끼는 것이 싫다.

 이런 저런 생각들에 빵빵해진 가슴에서 바람을 빼고 가벼워지고 싶다.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싶지 않아졌다.

 

Fiction을 가장한 Nonfiction

 모든 사람은 은밀한 한 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은밀한 내면의…

 나만이 알고 있는 혹은 나와 그만이 알고 있는 한 생..

 그것을 차마 풀어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fiction을 가장하여 자기 얘기를 풀어낼 수도 있으리라.

 그저 남 이야기처럼..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안의 저편에 쌓아두고 가리라.

 꼭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한편으론 나의 생을 모두 풀어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주 detail 하게 나의 생각과 관점들을 표현하고픈…

 그래서 fiction을 쓰나보다.

 또 누군가의 그런 얘기들을 듣고 싶다. Nonfiction으로…

 순간순간들의 느낌까지…

 “왜?” 라는 질문을 해가며… 느끼고 싶다.

 그런 얘기들을 서로 다 플어내도 허망하거나 후회되지 않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허나 그 또한 허황된 망상이다.

 어느 순간 비수가 되어 나에게 꽂힐 수 있는…

 그래서 fiction으로 풀어내거나 안풀거나…

 그런 아쉬움 또한 아름다움이리라.

 자연의 가르침은 그저 품고 가라 한다.

 뭐 그리 대단하다고 풀어대냐며…

 나의 생은 fiction으로 마감하련다.

 

 말의 상념

 말은 하는 것이지 던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번은 속에서 걸러지는 시간도 필요하다.

 습관적인 말투는 자신이 알기 어렵고..

 아이가 말을 배우며 어떤 말을 골라 해야 하는지 부모에게서 배운다.

 그 때는 던지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고 알게 된다.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른들의 의도적인 말의 던짐은 역겹다.

 이 사람에게 이 말을 해도 되는지,어디까지 되는지,

 안좋은 걸 알면서도 던진다.

 그 때 그 말의 꼬투리를 잡아 하지 말라고, 싫다고 말해야 한다.

 그냥 두면 해도 되는 줄 알고 선을 넘기 시작한다.

 아이도 아니면서…

 삶은 도전과 반응의 연속이다.

 어떻게 도전하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내 의식으로 결정해야 한다.

 반응하기 위한 용기는 따로다.

 문화라는 거대한 장르 안에 나를 담기 위한 그릇을 만드는 일이 성장이리라.

 문화적 성장이 멈추거나 환경적 변화로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반쯤 성장한 채로 생을 살아간다.

 언어라는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는 1세대 이민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다.

 어느 한 곳의 언어라도 확실하게 한다면 덜하겠지만.

 오늘도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이 있어 적어본다.

 

 어쩌다 와 일부러

 어쩌다 일어난 일이 현실이다.

 그것에 둘러싸여 살아가며 그것이 나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태어나 자라고,

 어쩌다 사람을 만나고 살며,

 또 어쩌다 사람을 만든다.

 현실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늘 과거를 살고 있다.

 끌려 살아온 과거..

 굴레를 맴돌고 있는..

 어쩌다 지금을 살고 있다.

 이 어쩌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의 에너지를 넣고,

 그림을 그려간다면 어쩌다가 일부러로 바뀔까?

 그렇다면 일부러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일부러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일부러 좋은 생각으로 에너지를 만들고,

 일부러 용의주도하게 원하는 나를 만들어간다면,

 일부러가 만든 나를 살아가겠지.

 항상 지금 나는 다른 방으로 옯겨가기 위한 문턱에 서 있다.

 일부러는 선택이다.

 어느 방을 선택할 것인지…

 이 일부러의 선택들이 내가 원하는 방으로 안내할 것이다.

 

 행동의 환상

 행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일어난다?

 지독한 시나리오에 이끌려 살고 있다?

 운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생각과 의식을 할 때만 자각된다고..

 그때를 제외하면 의식은 항상 잠들어 있고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인다고..

 이 시나리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고 있음을 모르는 무지함에서 벗어나야 하고,

 모든 외부의 자극에 대한 똑같은 단순한 반응에서 벗어나야 하고,

 모든 것을 실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누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능동적인 태도로 발목을 잡는 덫에서 빠져나와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말고 선택해야 한다고.

 문제가 생기면 숨지말고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사건을 영사기에 비추어 생각과 말과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직접 현실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봐야 한다.

 현실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현실을 통제하는 누군가가 존재할 때 그제야 그에게 귀속된다.

 현실이 나에게 귀속되길 바란다면, 가지고 선택하면 된다.

 새끼줄에 묶인 현실을 직접 몰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다 문제에 부딪히면 그를 영사기에  비추고 해결해가는 생각과 말과 상상으로 그리며 다시 선택하며 몰고가는 것이다.

 습관이 될 때까지 꾸준히 연습해야 할 것이다.

 

 소꿉놀이

 내게 필요한 것은 노력이 아니라 집중이다.

 원하는 것을 흉내내기 하는 것이다.

 만질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반대편에도 존재하고 있는 힘이 있다.

 더 이상 그 힘이 나를 맘대로 이끌지 못하도록 내가 고삐를 잡아야 한다.

 반딧불처럼 내 스스로 불을 밝히며..

 심각하게 온몸에 힘을 주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에게 다가오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앞쪽으로부터가 아니라 등 뒤로부터..

 소꿉놀이에 몰입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가지고..

 

 언젠가 죽음 앞에 선 내가 내게 하는 질문들

 죽음 앞에 선 내가 제일 후회하는 건 무엇인가?

 “없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선을 다하지, 뭘하든“

 지금껏 나를 무겁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나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한다는..“

 내 인생은 완벽했는가?

 ”내가 보기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다 하고 산 것 같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는 무엇이었나?

 ”하나였다“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그 순간에 어디에서 뭘하든, 나의 선택이었고 그래서 뭘 놓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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